폐비 윤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폐비 윤씨는 조선 성종의 계비로, 연산군의 생모이다. 1473년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으며,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되었으나 질투심과 과격한 행동으로 폐위되었다. 1479년 빈으로 강등된 후, 1482년 사사되었다. 이후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으며,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에 안장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삭탈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함안 윤씨 - 윤기견
윤기견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과 급제 후 집현전에서 활동하며 역사서 편찬에 참여했고, 계유정난 가담 후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딸인 폐비 윤씨로 인해 증직되었다가 추탈되었다. - 함안 윤씨 - 윤재기
윤재기는 석송초등학교, 공주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검사,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참여연대 등에서 활동했다. - 1482년 사망 -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우르비노 공작이자 뛰어난 용병대장이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인문주의를 후원하여 우르비노 궁정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 1482년 사망 -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으로 메디치 가문과 혼인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조언자로서 피렌체 정치에 기여했으며, 작가이자 예술 후원가로서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폐비 윤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폐비 윤씨 |
한자 | 廢妃 尹氏 |
로마자 표기 | Pyebi Yunssi |
다른 이름 | 제헌왕후 |
로마자 표기 (다른 이름) | Jeheon wanghu |
출생일 | 1455년 7월 15일 |
출생지 | 경기도, 조선 |
사망일 | 1482년 8월 29일 |
사망지 | 조선 |
묻힌 곳 | 회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
본관 | 함안 윤씨 |
가문 (결혼 후) | 전주 이씨 |
재위 | |
왕비 즉위일 | 1476년 8월 27일 |
왕비 폐위일 | 1479년 6월 21일 |
왕비 재위 기간 | 1476년 8월 9일 ~ 1479년 6월 2일 (음력) |
후궁 책봉일 | 1473년 3월 19일 |
후궁 책봉 종료일 | 1476년 8월 8일 |
왕비 즉위 이전 직위 | 종2품 귀인 |
가족 | |
아버지 | 윤기견 |
어머니 | 고령 신씨 |
배우자 | 성종 (조선) |
자녀 | 연산군 (왕자) |
기타 | |
추증 시호 | 제헌 (추후 삭탈) |
폐위 후 명칭 | 폐비 윤씨 |
2. 생애
1455년 윤6월 1일, 윤기견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5] 외할아버지인 신평(申枰)은 신숙주의 숙부이다.[6] 단종 재위 시절인 1455년 7월 15일, 함안 윤씨 윤기견(Yun Gi-Gyeon)과 그의 계실 고령 신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이복 형제 세 명과 친형 한 명이 있었다. 친형을 통해, 질녀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부인 이랑(Yi Ryang)과 혼인하였다. 어머니를 통해 윤씨는 신숙주(Shin Suk-ju)의 이종사촌이었다.
가난한 양반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는 아버지가 죽은 후, 1473년에 간택되어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종2품)에 책봉되었다.[7]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왕실의 세 명의 대비(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1476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에 책봉되었다.[8] 같은 해 11월 7일, 아들 연산군을 낳았다.[1] 왕비로 승격한 지 4개월 후였다.
그러나 윤씨는 왕비가 된 후 상당히 질투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과 궁중의 여관들에게 거만한 태도를 보이거나,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여관을 살해하는 등의 과도한 행위가 두드러졌다. 1477년, 자성대왕대비 윤씨는 귀인 권씨 집에 날아든 언문 투서를 발단으로, 중전 윤씨의 폐위에 대해 논하였다. 투서에는 당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가 왕비 윤씨와 원자(연산군) 모자를 해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9] 하지만 중전 윤씨가 어머니 신씨와 나인, 여종 등 주변 사람들을 시켜 꾸며낸 일임이 드러나자, 대왕대비와 성종은 윤씨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폐위하고자 하였다. 또한 왕비 윤씨가 극약인 비상(砒霜)을 갖고 있었던 일과, 굿을 하는 방법을 적은 서책을 성종에게 들킨 일 또한 성종이 윤씨에게서 마음을 돌린 이유 중 하나였다.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왕비의 폐위 혹은 빈(嬪)으로의 강등에 대해 논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비상과 서책을 반입한 나인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는 장 100대를 쳐서 변방의 관비로 보냈다. 윤씨는 질투심이 강하여 1477년에는 후궁 중 한 명을 독살하기도 했다.[3]
1479년, 성종은 윤씨를 폐위시켜 왕비에서 빈(정일품, 측실의 최고위)으로 강등시켰다. 성종은 윤씨의 실덕이 한 가지가 아니며, 자신을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육조의 판서와 참판들을 비롯해 종친들과 대간의 일부 신하들이 원자의 어머니임을 이유로 왕비 폐출에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북송 인종이 폐후 곽씨를 내쫓은 고사를 인용하며 뜻을 강하게 펼쳤고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보냈다. 이후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윤호의 딸인 숙의 윤씨(정현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하였다.[13]
3년 후, 오랜만에 성종이 윤씨를 방문했을 때, 윤씨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말다툼 중에 성종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는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록이 없고 사설에만 전해지는 소문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과 강한 남성 중심 문화, 그리고 남편이 왕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이를 알게 된 대비와 다른 후궁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성종은 윤씨를 폐비로 만들고 궁궐에서 추방했다. 더욱이 낳은 둘째 아들도 생후 3개월 만에 죽는 등 불행이 계속되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윤씨의 행실이 불량하자, 1482년 8월 16일, 성종은 명을 내려 폐비 윤씨를 사사하였다.[14] 윤씨를 사사한 전교를 보면 윤씨가 폐출되어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않고, 점차 원자가 장성하면서 윤씨의 폐출문제가 다시 공론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성종은 폐비 윤씨가 성품이 흉악하고 위험하며, 행실에 패역함이 많아 삼전에 공손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윤씨가 자신을 경멸하여 노예와 같이 대우하고, 발자취까지 없애버리겠다고 말했으며,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고 말했다. 성종은 이러한 이유로 종묘와 사직을 위해 윤씨를 사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폐비 윤씨는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폐출되어 사가로 내쫓겼고, 끝내 사약을 받아 숨졌다.[10] 실록에 기록된 윤씨의 언행은 성종에게 다소 불경한 말과 원망 섞인 말을 하였으며, 성종을 볼 때 낯빛을 바꾸고 '발자취를 없애 버리겠다'라는 말을 하였다.[10]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반신불수로 만드는 비법을 적은 책을 상자속에 숨겨두었다가 대비에게 발각되었고, 독약인 삼산화 비소를 묻힌 곶감을 가지고 있다가 들켰으며, 나무패의 말뚝을 박는 등의 주술행위를 저질렀다.[10]
성종은 윤씨를 폐출하면서 대신들에게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는 변을 만들지 않겠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대비는 윤씨가 평소 시비에게 죄가 있으면 족멸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등 원자를 가르치기에 옳지 않은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했다.[11] 자성대왕대비 또한 윤씨가 성종에게 눈을 빼고 발자취를 없애버리며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성종이 편치 못할 때 기뻐하는 등 흉악한 성품을 지녔다고 언급했다.
윤씨의 폐비와 사사를 둘러싸고는, 양반가 출신이지만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비와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모략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설도 있다. 윤씨의 묘비는 세우지 않았으나, 성종은 세자의 장래를 고려하여 “윤씨지묘”(= “회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간은 폐비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도록 유언하였으나, 연산군은 후에 윤씨의 죽음의 경위를 알게 되고, 이는 갑자사화로 이어지게 된다.
2. 1. 출생과 가계
본관은 함안이며, 1455년 윤6월 1일, 윤기견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5] 외할아버지인 신평(申枰)은 신숙주의 숙부(叔父)이다.[6]단종 재위 시절인 1455년 7월 15일, 함안 윤씨 윤기견(Yun Gi-Gyeon)과 그의 계실 고령 신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이복 형제 세 명과 친형 한 명이 있었다.
그녀의 친형을 통해, 그녀의 질녀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부인 이랑(Yi Ryang)과 혼인하였다. 어머니를 통해 윤씨는 신숙주(Shin Suk-ju)의 이종사촌이었다.
2. 2. 입궁과 왕비 책봉
본관은 함안이며, 1455년(단종 3년) 윤6월 1일, 윤기견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5] 외할아버지인 신평(申枰)은 신숙주(申叔舟)의 숙부(叔父)이다.[6] 성종의 후궁(後宮)으로 간택되어 1473년 3월 19일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다.[7]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왕실의 세 명의 대비(大妃), 즉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로부터 신뢰를 얻었다.성종의 정비 공혜왕후가 죽고, 1476년(성종 7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에 책봉되었다.[8] 같은 해 11월 7일, 아들 연산군을 낳았다.
1477년(성종 8년), 자성대왕대비 윤씨는 덕종(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 집에 날아든 언문 투서를 발단으로, 중전 윤씨의 폐위에 대해 논하였다. 투서에는 당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가 왕비 윤씨와 원자(연산군) 모자를 해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9]
하지만 중전 윤씨가 어머니 신씨와 나인, 여종 등 주변 사람들을 시켜 꾸며낸 일임이 드러나자, 대왕대비와 성종은 윤씨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폐위하고자 하였다. 또한 왕비 윤씨가 극약인 비상(砒霜)을 갖고 있었던 일과, 굿을 하는 방법을 적은 서책을 성종에게 들킨 일 또한 성종이 윤씨에게서 마음을 돌린 이유 중 하나였다.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왕비의 폐위 혹은 빈(嬪)으로의 강등에 대해 논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비상과 서책을 반입한 나인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는 장 100대를 쳐서 변방의 관비로 보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성종은 왕위 계승을 위해 두 번째 왕비를 맞이해야 했다. 윤씨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새 왕비로 간택되었고,[1] 1476년 8월 21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2. 3. 폐비 논의와 갈등
1476년(성종 7년),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가 죽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었고,[8] 같은 해 11월 7일, 아들 연산군을 낳았다.[1]1477년(성종 8년), 자성대왕대비 윤씨는 귀인 권씨 집에 날아든 언문 투서를 발단으로 중전 윤씨의 폐위를 논하였다. 투서에는 성종의 총애를 받던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가 왕비 윤씨와 원자(연산군) 모자를 해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9] 그러나 이는 왕비 윤씨가 꾸며낸 일로 드러났고, 대왕대비와 성종은 윤씨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폐위를 논의하였다. 왕비 윤씨가 극약인 비상(砒霜)을 갖고 있었던 일과, 굿을 하는 방법을 적은 서책을 성종에게 들킨 일 또한 폐위 논의의 이유가 되었다.
성종은 대신들과 왕비 폐위 혹은 빈(嬪)으로의 강등을 논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비상과 서책을 반입한 나인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는 장 100대를 쳐서 변방의 관비로 보냈다. 윤씨는 질투심이 강하여 1477년에는 후궁 중 한 명을 독살하기도 했다.[3] 1479년 성종은 윤씨를 폐위시켜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시켰다.
2. 4. 폐위와 사사
폐비 윤씨는 다소 과격한 언행으로 폐출되어 사가로 내쫓겼고, 끝내 사약을 받아 숨졌다.[10] 실록에 기록된 윤씨의 언행은 성종에게 다소 불경한 말과 원망 섞인 말을 하였으며, 성종을 볼 때 낯빛을 바꾸고 '발자취를 없애 버리겠다'라는 말을 하였다.[10]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반신불수로 만드는 비법을 적은 책을 상자속에 숨겨두었다가 대비에게 발각되었고, 독약인 삼산화 비소를 묻힌 곶감을 가지고 있다가 들켰으며, 나무패의 말뚝을 박는 등의 주술행위를 저질렀다.[10]성종은 윤씨를 폐출하면서 대신들에게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는 변을 만들지 않겠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대비는 윤씨가 평소 시비에게 죄가 있으면 족멸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등 원자를 가르치기에 옳지 않은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했다.[11] 자성대왕대비 또한 윤씨가 성종에게 눈을 빼고 발자취를 없애버리며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성종이 편치 못할 때 기뻐하는 등 흉악한 성품을 지녔다고 언급했다.
1479년(성종 10년) 6월 2일, 성종은 윤씨를 폐출하기로 결심하고 대신들을 소집하여 중궁 폐출의 교지를 내려 폐위하였다.[12] 성종은 윤씨의 실덕이 한 가지가 아니며, 자신을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육조의 판서와 참판들을 비롯해 종친들과 대간의 일부 신하들이 원자의 어머니임을 이유로 왕비 폐출에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북송 인종이 폐후 곽씨를 내쫓은 고사를 인용하며 뜻을 강하게 펼쳤고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보냈다.
이후 폐비 윤씨의 뒤를 이어 윤호의 딸인 숙의 윤씨(정현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하였다.[13]
1482년(성종 13년) 8월 16일, 성종은 명을 내려 폐비 윤씨를 사사하였다. 윤씨를 사사한 전교를 보면 윤씨가 폐출되어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죄를 뉘우치지 않고, 점차 원자가 장성하면서 윤씨의 폐출문제가 다시 공론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14] 성종은 폐비 윤씨가 성품이 흉악하고 위험하며, 행실에 패역함이 많아 삼전에 공손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윤씨가 자신을 경멸하여 노예와 같이 대우하고, 발자취까지 없애버리겠다고 말했으며,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고 말했다. 성종은 이러한 이유로 종묘와 사직을 위해 윤씨를 사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윤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책봉되었다. 1473년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147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연산군이 된 이융을 낳았다. 그러나, 윤씨는 질투심이 강하여 1477년 후궁 중 한 명을 독살하기도 했다.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록이 없고 사설에만 전해지는 소문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과 강한 남성 중심 문화, 그리고 남편이 왕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여러 복권 시도 끝에, 권력 있는 관료들이 그녀의 처형을 청원했고, 폐출된 왕비는 독살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피가 묻은 옷을 어머니에게 주며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후에 폐비 윤씨로 알려지게 되었으며,[2] 가난한 양반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는 아버지가 죽은 후, 1473년에 간택되어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종이품)에 책봉되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던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에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2년 후 성종은 인수대비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신 중이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왕비로 승격한 지 4개월 후, 원자(연산군)를 출산하여 왕비의 지위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러나 윤씨는 왕비가 된 후 상당히 질투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과 궁중의 여관들에게 거만한 태도를 보이거나,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여관을 살해하는 등의 과도한 행위가 두드러졌다. 1477년, 비소를 숨기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다른 후궁을 독살하려 했던 혐의를 받고 강등될 위기에 처했으나 성종의 배려로 면했다. 처음에는 관용적으로 대했던 성종도 점차 윤씨를 멀리하게 되었고, 윤씨를 방문한 성종은 윤씨의 어머니가 남긴 상자에서 저주가 적힌 글을 발견했다. 1479년, 성종은 이 일로 윤씨를 폐위시켜 왕비에서 빈(정일품, 측실의 최고위)으로 강등시켰다.
3년 후, 오랜만에 성종이 윤씨를 방문했을 때, 윤씨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말다툼 중에 성종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는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이를 알게 된 대비와 다른 후궁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성종은 윤씨를 폐비로 만들고 궁궐에서 추방했다. 더욱이 낳은 둘째 아들도 생후 3개월 만에 죽는 등 불행이 계속되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윤씨의 행실이 불량하자, 1482년 8월,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윤씨의 폐비와 사사를 둘러싸고는, 양반가 출신이지만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던 윤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비와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모략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설도 있다. 윤씨의 묘비는 세우지 않았으나, 성종은 세자의 장래를 고려하여 “윤씨지묘”(= “회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간은 폐비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도록 유언하였으나, 연산군은 후에 윤씨의 죽음의 경위를 알게 되고, 이는 갑자사화로 이어지게 된다.
3. 사후
윤씨 폐비 사후, 궁중 신료들은 성종에게 후궁 중에서 왕비를 간택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 결과, 폐경 윤씨의 딸인 폐평 윤씨(윤씨) 소의가 왕비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정현왕후가 윤씨 폐비의 죽음에, 그녀의 아버지 윤호와 6촌 당숙인 윤필상과 함께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당시 17세였던 정현왕후가 폐비 윤씨의 폐출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순왕후 또한 배후에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자신의 생모로 여기며 자랐다. 그러나 1494년, 어린 왕은 자신의 생모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게 되고 사후에 그녀의 작위와 지위를 복권시키려 했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로 인해 폐비 윤씨의 죽음은 연산군이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료들과 비판 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이 되었다.
연산군의 재위 시절, 그는 생모에게 "제헌왕후"(제헌왕후/齊獻王后중국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3. 1. 회묘와 회릉
1498년(연산군 4년) 경기도 양주군 천장산(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으로 이장되었고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연산군 폐위 후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고, 회묘가 있는 마을은 회터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어 회기동의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969년 10월 25일 경기 고양군으로 이장하였으며, 현재의 위치는 고양시 덕양구이다.묘소의 이름은 회묘(懷墓)이며,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양주군 망우리면 망우리(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으로 이장되었다.
윤씨 폐비 사후, 궁중 신료들은 성종에게 후궁 중에서 왕비를 간택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 결과, 폐경 윤씨의 딸인 폐평 윤씨(윤씨) 소의가 왕비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정현왕후가 윤씨 폐비의 죽음에, 그녀의 아버지 윤호와 6촌 당숙인 윤필상과 함께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당시 17세였던 정현왕후가 폐비 윤씨의 폐출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순왕후 또한 배후에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자신의 생모로 여기며 자랐다. 그러나 1494년, 어린 왕은 자신의 생모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게 되고 사후에 그녀의 작위와 지위를 복권시키려 했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로 인해 폐비 윤씨의 죽음은 연산군이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료들과 비판 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이 되었다.
연산군의 재위 시절, 그는 생모에게 "제헌왕후"(제헌왕후/齊獻王后중국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3. 2. 갑자사화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고, 묘소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15] 중종반정 이후, 시호와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 국문하고 처형하였는데, 공신인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하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이세좌는 처형하였으며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는 고문 끝에 죽여버렸다.[15] 이외에 사건과 관련된 훈구 공신들이 화를 입었는데, 중종반정의 구실 중 하나가 되었다.
연산군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 윤씨의 작위와 지위를 복권시키려 하였으며, 이는 연산군이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료들과 비판 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이 되었다.
4. 가족 관계
폐비 윤씨의 본관은 함안이며, 아버지는 함안부원군 윤기견이고, 어머니는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이다.[16] 어머니 신씨는 신숙주의 사촌 동생이다.
colspan="2" |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부 | 윤기견 尹起畎 | 함안 | 생몰년 미상 | 윤응 尹應 안동 권씨 安東 權氏 | |
모 | 신씨 申氏 | 고령 | ? - 1504년[16] | 신평 申枰 장흥 마씨 長興 馬氏 | 신숙주의 사촌 동생 |
남편은 성종이며, 1457년 음력 7월 30일 한성부 세자궁에서 태어나 1495년 1월 19일(1494년 음력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작호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장남 | 연산군 燕山君 | 융 㦕 | 1476년-1506년 | 폐비 신씨 廢妃 慎氏 | 제10대 국왕 |
차남 | [17] | colspan="2" | |
5. 평가 및 대중문화
-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서 폐비 윤씨를 소재로 다루었다.
- 김영임의 회심곡(悔心曲)은 폐비 윤씨를 소재로 한 노래이다.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 이기선이 연기하였다.
- 1987년 영화 《연산군》에서 선우은숙이 연기하였다.
-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서 김영애가 연기하였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장서희가 연기하였다.
-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김성령이 연기하였다.
-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이주희가 연기하였다.
-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구혜선과 박보영이 연기하였다.
-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방영된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전혜빈과 진지희가 연기하였다.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우희진이 연기하였다.
5. 1. 미디어
-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서 폐비 윤씨를 소재로 다루었다.
- 김영임의 회심곡(悔心曲)은 폐비 윤씨를 소재로 한 노래이다.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 이기선이 연기하였다.
- 1987년 영화 《연산군》에서 선우은숙이 연기하였다.
-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서 김영애가 연기하였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장서희가 연기하였다.
-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김성령이 연기하였다.
-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이주희가 연기하였다.
-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구혜선과 박보영이 연기하였다.
-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방영된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전혜빈과 진지희가 연기하였다.
- 2017년 KBS2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우희진이 연기하였다.
참조
[1]
문서
Princess Noguk's face
[2]
웹사이트
폐비 윤씨
https://terms.naver.[...]
[3]
서적
Engraving Virtue: The Printing History of a Premodern Korean Moral Primer
https://books.google[...]
BRILL
2013-05-24
[4]
실록
중궁 폐출의 교서를 내리다
1479-06-02
[5]
웹사이트
폐비 윤씨
https://terms.naver.[...]
2004
[6]
웹사이트
폐비윤씨
https://terms.naver.[...]
[7]
실록
고(故)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을 숙의로 맞아들이다
1473-03-19
[8]
실록
인정전에 나아가 중궁을 봉하다
1476-08-09
[9]
실록
대왕대비의 명으로 중궁을 폐하는 문제를 논하다
1477-03-29
[10]
실록
중궁을 폐출한 연유를 대신들에게 알리다
1479-06-05
[11]
실록
중궁을 폐출한 연유를 대신들에게 알리다
1479-06-05
[12]
실록
대신들과 의논하여 중궁을 폐출케 하고, 반대한 승지들을 6조의 참의로 개차 하다
1479-06-02
[13]
실록
1480-10-04
[14]
실록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1482-08-16
[15]
실록
폐비를 제헌왕후로 추증하는 교서를 내리다
1504-03-25
[16]
실록
장흥부부인 신씨의 초상을 각 관사가 보살피도록 하다
1504-11-03
[17]
실록
폐비 윤씨의 소생인 왕자가 죽다
1479-06-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